수원 화성
조선 태종때 도호부로 승격된 수원은 한성 4진의 하나였다
한양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방향인 광주, 강화, 수원, 개성에 진을 설치하여
수도 한양을 보위케 한 것이다
그 수원땅을 지키고 있는 화성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역사적 가치를 높이고 있다
또한 다양한 상설 공연을 진행하고, 매년 가을이면 수원화성문화제를 개최하여
수원 화성을 알리고 있다
팔달산(143m)을 중심으로 쌓은 화성(사적)은 총길이가 5,700m에 달한다
화성은 단순한 하나의 '성'이 아니며
역사적 의미와 함께 건축학적으로도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화성의 축성은 정조의 한과 효심에서 비롯됐다
1762년 영조 38년 윤5월21일 사도세자 (장조:고종때 추존)는 당쟁으로 인하여
한여름 뒤주 속에 갇혀 8일만에 죽었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당시 11세였다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즉위13년만에 부친의 고혼을 위로키 위해
묘를 양주 땅 배봉산(지금의 서울시 전농동)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수원을 자신이 이상으로 꿈꾸는 신도시로 건설하고자
정조 18년 정월부터 20년9월까지에 걸쳐 성곽을 축성하였다
화성은 조선 성곽제도의 최고 완성형이다
한국 성곽 발달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 성은 석성과 토성의 장점만을 살려 축성됐다
화성축성에 매달린 선조들은 한국성곽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중국과 서양의 축성술을 본뜨기도 했다
이 성에 관련된 사항은 "화성 성역의궤"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화성의 건축과 관련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당시 30세였던 다산은 왕실서고 규장각에 비치된 첨단서적들을 섭렵하고
중국에서 들여온『고금도서 집성』5,000권을 참조해 새로운 성곽을 설계했다
정약용은 거중기를 고안하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성에는 성문을 비롯, 48개의 시설물이 있었지만
현재 복원된 것을 포함해 41개의 시설물이 남아 있다
보물 팔달문을 비롯해 팔달산을 둘러싼 시설 가운데
가장 높은 서장대, 화포를 감춰두고 적군에게 총을 쏘도록 축조된 남포루
선조들의 정취가 가득한 방화수류정 등 200년전 건물엔 조선의 문화 향기가 가득하다
화성은 1997년12월4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UNESCO)세계유산위원회에서 창덕궁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성곽의 주요부분인 성벽과 장안문(長安門)등 4대문
북포루(北鋪樓)등 5개 포루, 북동포루(北東砲樓)등 5개 포루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등 2개 공심돈, 서북각루(西北角樓)등 4개 각루
북암문(北暗門)등 4개 암문, 화홍문(華虹門)등 2개 수문, 서1치(西1雉)등 10개 치
북동적대(北東敵臺)등 2개 적대, 화성장대(華城將臺)등 2개 장대, 서노대(西弩臺)등 2개 노대
서남포사(西南鋪舍)등 2개 포사, 봉돈(烽墩)등 45개의 시설물로 이루어져 있다
남공심돈(南空心墩)등 7개의 시설물과 북지(北池)등 5개의 연못이 미 복원 상태로 남아 있다
-- 수원화성의 건축용어 --
옹성(甕城)
성문을 엄호하기 위해 성문 바깥쪽에 반원형을 쌓은 성이며
2중 방호이다
팔달문과 장안문은 정면에 옹호문을 둔 것이 특징이다
화서문이나 창룡문은 옹호 한쪽에 문을 두고 있다
치(雉)/치성(雉城)
제 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는 꿩에 비유해서 치성이라 명명했다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 나오도록 한 구조물로서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군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물이다
적대(敵臺)
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성 따위에 높게 세워둔 누대이다
화성 4대문 중 장안문과 팔달문 양쪽 치성 위에 세웠다
돈대(墩臺)
평지보다 조금 높직하면서 두드러진 평평한 땅을 돈지라 한다
성벽 위에 석재 또는 전으로 쌓아올려 망루와 포루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높직한 누대이다
원형과 방형 두가지가 있는데 수원성곽에는 서북,남,동북 3곳에 돈대를 설치하고
공심돈(空心墩)이라 불렀다
속이 텅 비어있는 돈대란 의미로 현재 서북공심돈만 남았다
정약용이 서양 중세봉건제후의 성을 본뜬 것으로 안에서
총,포를 쏠 수 있게 벽을 이삼층으로 쌓아올린 성곽구조물의 하나이다
장대(將臺)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가 올라서서 지휘하도록
성(城), 보(堡), 둔(屯), 수(戍) 따위의 높은 곳에 돌로 쌓은 대이다
화성에는 팔달산 가장 높은 곳에 서장대 그리고 동북공심돈 아래 넓은 곳에
동장대(연무대라고도 함) 두곳이 있다
연무대에는 군사훈련을 하며 현재는 국궁활쏘기 체험장이 있다.
봉돈(烽墩)
봉화연기를 피우는 돈대라는 의미이다
경복궁 맞은편 남산에 봉돈이 있듯 수원화성행궁에서 잘 보이는 성곽에 봉돈을 설치하여
봉수꾼이 화성행궁과 주변을 정찰하여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낸다
포루(砲樓)와 포루(鋪樓)
발음이 같아서 혼동하기 쉽다
포루(砲樓)는 대포를 발사하기 위해 쌓은 루대를 말한다
화성에는 5개의 포루(砲樓)가 있다. 또 포루(鋪樓)는 치성위에 설치한 누각이다
암문(暗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만들어 적에게 들키지 않게 군수물자를
성안으로 공급 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시설로 유사시에는 문을 닫고
주변에 쌓아 둔 돌과 흙으로 암문을 메워 폐쇄하도록 하였다
각루(角樓)
높은 위치에 건물을 세워 주변을 감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곳을 말하며
수원화성에는 총4개소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중 동북각루는 방화수류정이라고도 한다
수원에는 수원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자연을 체험할 수 있는 8가지 길인 팔색길이 있다고 한다
오늘 부산갈맷길 걸으러 갈려고 표를 예매 해 놓았는데
갑자기 신랑님 일이 생겨 취소를 하고
혼자 어디를 갈까 생각하다가 이곳으로 결정~~
수원역에서 이동하여
여덟번째 길인 수원성곽길을 걸어 보기로하고
위 지도 팔달문에서 시작하여 왼쪽으로해서 원점으로 한바퀴 쓰윽 돈다
팔달문
4대문 중 남쪽 대문으로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문이며
정조대왕과 당대 국왕들이 현륭원을 가기 위해 통과한 문이다
1794년 2월 28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9월15일에 완공하였다
팔달문은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의 의미이며
축성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에
보물 제4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원형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해서 붙인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하늘은 엄청나게 푸르다
내려다 보니 멀리는 약간 시야을 흐리게 한다
팔달산의 남쪽 기슭 경사지에 지은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동포루,서포루,남포루,북동포루,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다
그 중 남포루는 규모가 가장 작지만 포루 중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다
서남암문은 화성 서남쪽에 낸 비상 출입문으로
5곳 암문 가운데 유일하게 문 위에 군사들이 머무는 포사(舖舍)를 세웠다
이곳은 지형상 적에게 빼앗기면 성안이 노출될 우려가 있어서
특별히 포사를 만들어 침입을 대비했으며 암문에는 화공에 대비하여 오성지도 설치하였다
이름은 암문이지만 성 안팎을 드나드는 통로가 아니라 용도를 거쳐 서남각루(화양루)로 나가는 문이다
암문으로 나가보니
이 용도로 쭉~~걸어가면 서남각루가 있다는데
다음에 걸어 보기로하고
다시 성곽안으로 들어와서 진행한다
성곽길에서 약간 벗어난 길도 이쁘게 해 놓았다
가을이 떠나기 싫었나 보다
팔달산 중턱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시설이다
동포루,서포루,남포루,북동포루,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다
서포루는 경사지에 지었기 때문에 평지에 설치한 북서포루와 북동포루보다 규모를 작게 만들고
화포와 총을쏘는 구멍의 숫자도 줄였다
포루는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에는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이 있고 상층에는 누각이 있다
서포루 상부의 누각은 복원했으나 벽돌로 만든 하부에는 창건 당시의 모습이 일부 남아 있다
언제봐도 이쁜 단풍잎~~
서장대가 보인다
서암문으로 나와서 본 성곽
화성장대
팔달산 정상에 자리 잡은 군사 지휘소로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서장대는 군사 훈련 지휘소로 썼다
시야가 트여 있어 멀리 용인 석성산 봉화와 융릉 입구까지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아래층은 사면 3칸,위층은 1칸으로 위로 가면서 좁아진 형태다
아래층은 장수가 머물면서 군사 훈련을 지휘하고
위층은 군사가 주변을 감시하는 용도로 썼다
정조는 서장대에서 군사 훈련인 성조(城操)조를 거행했는데
1795년의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으며
위층 처마 밑에 걸린 화성장대(華城將臺)와 시문현판은 모두 정조의 작품이다
1795년 성조식이 끝난 뒤 정조는 화성장대 현판의 글씨를 쓰고
만족스럽고 기쁜 마음을 시로 표현했다
유일하게 정조가 짓고 글씨를 쓴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정조가 화성장대에서 군사 훈련을 지켜본 후 감회를 읊은 시(詩)로
정조는 1795년 수원 행차 넷째 날인 윤2월 12일에 서장대에 올라
장용영 외영 군사들의 훈련 모습을 지켜 보았다
이날의 훈련을 기념하고자 친히 시를 짓고
이 시를 현판에 새겨 서장대에 걸도록 하였다
본래 서장대 2층에 게시되어 있었으나 복제본은 1층에 두었고
원본 현판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깨끗한날엔 조망이 아주 좋을 것 같은데 살짝 아쉬움~
멀리 광교산 능선이 보인다 다음에 올라 볼 산으로 쿡~~
가야 할 성곽도 보이고~~
기계식 활인 노(弩)를 쏘기 위해 높게 지은 시설로
군사지휘소인 서장대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노대는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다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는데
서노대는 화성의 서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팔달산 꼭대기에 있어
적을 감시하기에 적합하다
팔각형의 몸체가 위로 가면서 줄어드는 안정적인 형태로
안에는 흙을 채우고 겉은 벽돌로 마감하였다
올라와서 본 서노대
서노대에서 본 서장대
서장대를 뒤로하고 내려간다
포근한 햇빛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화서문 방향으로~~
아이들이 나들이를 나왔네 에구 귀요미들~~
서북각루와 서포루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이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는 공격하는 역할을 했으며
성벽에는 8곳이 있다
성곽밖의 풍경
서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로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다
팔달산으로 오르는 경사지에서 성벽이 휘어진 곳에 자리 잡아
서북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래층에는 군사들이 머무는 방에 온돌을 놓았고 위층은 마룻바닥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사면에 널빤지 문을 달고 구멍을 내서 적을 감시했다
성곽길을 걷다가 띄엄띄엄 성곽밖도 담아보고...
뒤돌아 본 서북각루
서문으로 화성의 서쪽이란 뜻이지만 서쪽에는 팔달산이 있어 서북쪽에 문을 두었다
문밖으로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높다란 서북공심돈을 함께 세웠다
조선 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다
같은 성문이지만 장안문과 팔달문은 높은 격식을 갖춘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한 단계 격을 낮춘 형태이다
석축의 규모도 작고, 1층 문루에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졌다
화서문은 창건 당시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어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18세기 건축 기술을 보여준다
옹성 안 석축에는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과 우두머리 석공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서울과 개성, 강화도에서 온 석공이 참여 했는데
박상길은 축성이 끝난 후 석공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의 상을 받았다
현판은 화성 축성의 총책임자였던 채제공이 썼으나 원본이 남아 있지 않다
가을 흔적~~
화서문 밖으로 나와서 본...
서북공심돈과 화서문
다시 성곽안으로 들어와서 걷는다
화서문
서북쪽에 세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보통 돈대(墩臺)는 성곽과 떨어진 높은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서북공심돈은 서북쪽 성벽이 꺾이는 위치에 설치했다
치성 위에 벽돌로 3층의 망루를 세우고 꼭대기에는 단층의 누각을 올려
군사들이 감시할 수 있도록 하고 외벽에는 화포를 쏠 수 있는 구멍을 뚫어 공격 기능까지 갖추었다
조선 정조 21년(1797) 정월 완성된 화성을 둘러보던 정조는
서북공심돈 앞에 멈춰 “우리나라 성곽에서 처음 지은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
모두 세 곳에 공심돈을 세웠는데 서북공심돈만이 축성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화성어차
수원화성의 주된 관광 포인트를 순환하는 관광열차로
순종이 타던 자동차와 조선 시대 국왕의 가마를 모티브로 하여 제작되었다
장소는 연무대(순환형),화홍문(순환형),화성행궁(관광형)에서 출발하며
동력차1량,객차3량등 총4량이며 주행속도는 시속 약 20km 내외이다
1회 운행 시 승차 인원은 36명 내외이며
요즘은 코로나19 때문에 좌석 간 거리두기를 적용하여 50% 좌석만 운영되며
순환형 화성어차만 우선 운행된다
북서포루와 서북공심돈 사이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치성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 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동2포루,서포루,북포루,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다
북포루는 화성에서 가장 평탄하고 시야가 트인 곳에 있어서
주둔하는 군사의 수도 많고 규모도 크다
군포루라고도 불렀다
루마다 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 갈 수가 없는 아쉬움...
성곽밖 단풍이 이뻐서 당겨보고
5개 포루(砲褸)중 하나이다
화서문과 장안문 사이에 위치하며 1794년(정조18)9월 24일 완공 되었다
포루는 성벽의 일부를 바깥으로 튀어 나오게 만든 치성 위에 3층의 내부를 비워두고
그 안에서 화포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시설물로
포루와 치성은 성곽 밖으로 완전히 돌출된 반면
이 적대는 반만 외부로 돌출되고 반은 성안으로 돌출되어 있다
성곽보다 높게 만들어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
총안등을 만들어 유사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고
장안문의 서쪽에 위치하여 북서적대라고 한다
올라 가 보니....
장안문이 보인다
화홍문 방향으로~~
장안문 바깥에 반달모양으로 쌓은 성으로 성문을 이중으로 지키는 시설이다
출입문을 옹성 한 가운데 내서 출입하기 편하도록 했다
조선시대 여러 성곽에도 옹성이 설치되어 있지만
출입문이 중앙에 나 있는 사례는 장안문과 팔달문이 유일하다
문 위에는 물을 저장하는 오성지(五星池)를 설치하여 화공(火攻)에 대비했다
화성에만 설치한 색다른 방어시설로서 정약용이 제안 했으나 설계안대로 시공되지 못했다
성곽밖에서 본 장안문
북쪽으로 서울의 궁궐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현륭(융릉)을 바라보며
만년의 편안함을 길이 알린다는 뜻으로 수원 화성의 북문으로
문 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甕城을 만들고 방어를 위해 좌우에 적대를 세웠다
남문인 팔달문과 더불어 화성에서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2층의 누각은 네 모서리 추녀가 길게 경사를 이루면서
용마루와 만나는 우진각 지붕 형태다
길고 휘어진 목재를 구하기 힘든 조선 시대에 우진각 지붕은
궁궐이나 도성의 정문과 같은 건물에만 쓰였다
문루 처마 밑에는 다포(多包)라는 화려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받침 목재를 짜 맞췄는데
다포식 건물은 18세기 이후 궁궐에서도 거의 백년 동안 짓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강원도 출신의 승려 목수인 굉흡이 와서 건설을 도왔다
다시 안으로~~
치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 나오게 만든 시설이다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쉽게 공격하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다
치(雉)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자기 몸은 잘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그 모양을 본따서 치성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북동치는 북동적대 바로 옆으로 적대와 서로 이어져 있다
뒤돌아 본 장안문
5개 포루(砲樓) 중 장안문과 화홍문 사이인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4년(정조 18) 9월 23일에 완공되었다
포루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포(火砲)를 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성벽의 일부를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성의 발전된 형태이다
중간을 남북으로 흐르는 수원천 위에 북수문과 남수문 등 두개의 수문을 세웠다
1794년 2월28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5년(정조19)1월13일에 완성하였다
북수문은 편액을 화홍문이라 하였다
화(華)자는 화성을 의미하고 홍(虹)자는 무지개를 뜻하는 글자로
장쾌한 물보라가 수문으로 넘쳐나는 모습을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팔경의 하나로 꼽았다
북수문은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물이 통과하는 수문에는 쇠창살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입을 차단 하도록 하였다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이다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5개의 암문 중에서 북암문은 방화수류정과 동북포루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화성에서 유일하게 벽돌로 좌우 성벽을 쌓았으며
1796년(정조 20) 3월 27일 완공되었다
북암문으로 나와서 본....
동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로
용두(龍頭)바위 위에 각루를 우뚝 세워 주변을 감시하고
화포를 쏠 수 있도록 했다
군사 시설이지만 아름다운 연못과 함께 있어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많이 쓰였으며
정자의 별칭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다
정조는 이를 현륭원이 있는 화산(花山)과 수원 읍치를 옮긴 땅
유천(柳川)을 가리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방화수류정에는 온돌방 한 칸이 있었다
보통 군사들의 휴식을 위해 각루 1층에 온돌방을 만들었는데
방화수류정은 임금을 위해 2층에 온돌방을 만들고 창문을 설치했다
조선 정조 21년(1797)정월 정조는 방화수류정에서 활쏘기를 하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시를 지었다
지금은 온돌방이 사라졌지만 원형의 건축물이 잘 남아 있다
여기 올라가서 용연을 봐야 했는데 보지 못했음을.....다음엔 꼭~~
용연
북쪽 성밖에 있는 연못으로 용머리처럼 생긴 용두 바위에서 유래 했으며
용두 바위 위에 있는 방화수류정은 용두각이라고도 부른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용연이 반달처럼 생겼고
용두 바위는 물고기를 잡는 조대(釣臺)로 쓸 만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용연의 물이 넘치면 서쪽의 출수구를 통해 수원천으로 흘러 나간다
출수구에는 용이 되기 전 단계의 짐승인 이무기 상을 새겼는데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용연에 비친 달이 떠오르는 모습인 용지대월(龍池待月)은
화성에서 보아야 할 아름다운 경치로 꼽힌다
방화수류정과 동장대 사이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지은 시설이다
모두 5곳의 포루가 있는데
동북포루는 지붕의 모습이 조선시대 선비들이 쓰던 각건(角巾)이란
모자와 비슷해 보여서 각건대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동북포루는 다른 포루에 없는 시설을 같췄다
여장과 건물사이를 벽돌로 채워서 벽등이라는 단을 만들고 누각의 계단도 벽돌로 만들었다
지붕 양 끝에 올린 용머리 모양의 장식 기와 역시 동북포루에서만 볼 수 있다
동북포루의 특징을 살려 2019년에 다시 복원했다
동암문으로 나가서 보고....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이다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 되었으며
5개의 암문이 있는데 암문 위에 벽돌을 깔고 커다란 둥근 담장이 설치된 구조이며
1796년(정조20)3월25일에 완공되었다
동장대가 보인다
동장대,연무대
동장대는 장수가 군사 훈련을 지휘하던 곳으로 연무대(鍊武臺)라고도 불린다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서장대는 군사 훈련 지휘소로 썼다
정조는 동장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내려주는 호궤(犒饋 )행사를 베풀었는데
화성 축성이 마무리 되던 시기인 1796년 8월 19일 감독관과 일꾼등 2,700여 명이 호궤에 참여했다
불랑기5호
조선시대 대표적인 휴대용 화포
길이 73cm, 총구는9.5cm, 불랑은 프랑크라는 유럽인을 뜻하는 말
서양에서 만든 화포 불랑기
몸전체가 큰1호부터 작은5호로 구분되며 발사틀의 구실을 하는
모포(母砲)와 실탄을 장전하여 모포에 삽입 해 발하사는 자포(子砲)로 이루어져 있다
여러개의 자포를 이용해 연속 사격이 가능 해 임진왜란 이후
육전은 물로 해전에서도 그 위력을 발휘함으로서
조선 제일의 화기로 평가 받았다
동북공심돈이 보인다
동북공심돈
동북쪽에 세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외벽에는 밖을 감시하고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구멍을 곳곳에 뚫었다
3층으로 이루어진 원통형의 벽돌 건물로서 출입문에서 통로를 따라
빙글빙글 올라가면 꼭대기 망루에 이르는 구조다
이 모습을 빗대서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노(기계식 활)를 쏘기 위한 시설이다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곳이며
높다란 대를 만들지 않고 성벽에서 만들었지만 주변이 평탄해서 시야가 확보되었다
좌우 성벽이 만나는 지점을 살짝 좁혀 쌓았는데
화성성역의궤에서는 그 모양을 벌의 허리와 같다고 표현했다
홍시가 된 감이 주렁주렁~~아깝다
창룡문
동문이다
창(蒼)은 푸른색을 가리키므로 동쪽 방향을 지키는 신령한 청룡을 상징한다
바깥쪽에서 보면 안쪽으로 휘어 들어가는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돌출된 좌우 성벽이 자연스럽게 성문을 보호하는 치성 역할을 한다
문 안쪽의 넓은 공터는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쓰였다
옹성 안 석축에는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과 석공 우두머리 이름을 새긴 실명판이 잘 남아 있다
밖에서 본 창룡문
5개 포루(砲樓) 중 동쪽 동일치와 동이치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년(정조 20) 7월 16일 완공되었다
포루는 성벽의 일부를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성 위에 3층의 내부를 비워두고
그 안에서 화포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봉화 연기를 올려 신호를 보내는 시설로 인적이 드문 곳에 두는
봉화대와 달리 화성에서는 시야가 트인 동쪽에 설치해
화성행궁에서 바로 확인 할 수 있었다
외벽과 내부 계단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벽돌로 만든
대표적인 벽돌 건축물이다
높게 쌓은 대(臺)위에 횃불 구멍인 화두(火竇) 다섯 개가 있다
평소에는 남쪽 끝에 있는 화두 한 곳에만 연기를 올리고
상황에 따라 연기의 숫자를 증가시켜 전쟁 시에는 다섯 곳 모두 연기를 피웠다
남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모두 4곳의 각루가 있다
동남각루는 남수문에서 동쪽으로 솟아오른
경사지에서 성벽이 휘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풍수에서 안산(案山)에 해당하는데
봉우리가 일(一)자 모양처럼 평평하여
일자문성(一字文星)이라고 불렀다
서북각루와 같은 구조로 아래층 군사들이 머무는 방에는
온돌을 놓았고 위층은 마룻바닥으로 만들었다
사면에 짐승 얼굴과 태극무늬를 그린 널빤지 문을 달고 활 쏘는 구멍을 냈다
동남각루를 뒤로하고 내려간다
올려다 보고
시작했던 팔달문쪽으로 간다
팔달문 앞쪽에 있는 팔달문시장을 빠져나와
다시 한번 팔달문을 보고 광교호수공원으로 간다
p.s:
화성행궁은 돌아보지 못하였다
다음에 꼼꼼히 보기로~~
수원화성행궁
1789년(정조13년) 수원 신읍치 건설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한 행궁으로
수원부 관아와 행궁으로 사용되다가 1794년~1796년에 걸쳐 진행된 화성축성 기간에
화성행궁을 확대하여 최종 완성되었다
정조는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인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원침인
현륭원(현재의 융릉)을 3차례 참배하였으며 이 기간 중 화성행궁에서 유숙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봉수당,복내당,유여택,신풍루,우화관,득중정 등
600여칸으로 정궁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나라 행궁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으며
정조대왕께서 모친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을 열었던 궁이기도 하다
낙남헌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시설물들은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정책으로 인해
사라져 버렸지만 1980년대 복원추진위원회의 복원운동 결과
1996년부터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마침내 화성행궁 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 3월 일반에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광교호수공원(光敎湖水公園)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하동 일대에 위치한 공원이다
매년 300만명 이상이 방문한다
농업을 위해 만들어 둔 원천호수와 신대호수를
광교신도시 개발에 맞추어 공원으로 정비했으며
정비되기 이전에는 수원시에 위치한 유일한 유원지로서
원천유원지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한바퀴 돌아 보기로 한다
멋진 반영이 반갑게 맞아 준다
산수유열매가 꽃이 되다
노랑어리연 잎이 가득가득~~
수원역으로 이동하여 대전행 기차를 탄다
대합실을 빠져 나오니
광장에 해 놓은 이쁜 트리에 감탄을 하면서
올 한해도 가고 있구나하면서 하루 일정을 마감한다
수원화성을 꼭 가 보고 싶었다
정리를 하다보니 뭐가뭔지 머리속이 엄청 헷갈렸다
다음에는 밖의 길도 걸어 보면서
수원화성에 대해 제대로 알아 보고픈
다른 곳의(북한산성,금정산성,등등.....)성곽들은
거의가 산능선을 이어서 있는데
수원화성은 도심의 중간에 있다는 것이 특이 하였으며
몇번을 찾아도 후회하지 않을 아주 좋은
광교호수공원도 참 이쁘고 멋진 곳이었다
2021. 12.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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