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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걷고 싶을때..

세종시 전월산(260m)/원수산(251m)오산(178m)에 가다

by 샘 터 2012. 12. 23.

 

 

  

 

 

 

당신의 바람.......김용택

 


오늘도

새벽 창문을 엽니다

이상한 바람이 건듯 불었습니다

그 품에 안기면 모든 시름이 녹아 버릴 것 같은

따스한 바람이었어요

당신의 품이런 듯 눈을 감고

바람 속에 오래 서 있었습니다

 

 

 

 

 파란색 표시된 부분이 오늘 걸었던 길이다

 

 

 

 

이 은행나무는

고려말 탐라(제주도) 정벌에 공을 세우고

공조전서를 지낸 임난수 장군이

멸망한 고려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심은 것이다

 

공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공주 금강변 삼기초(현 양화리)에 은거 하였는데

이성계가 여러번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끝까지 응하지 않고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이때 심은 암수 한쌍의 은행나무가 600여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충절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나라에 큰 변이 생길때마다

울었다고 하는데

1910년 한일합병과 6.25전쟁때 울었고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이 나무를 베려고 하였으나

나무에서 소리가 나 베지 못했다고 한다

 

 

 

 

 

 

 

 

 

 

 

 

 

 

 

 

 

 

 

 

 

 

 

 

 

 

 

 

 

 

 

 

 

 

 

 

 

 

 

 

 

 

 

 

 

 

 

 

 

 

 

 

 

며느리 바위 전설

 

아주 먼 옛날 이 곳에는

"장자소"라는 연못이 있었다

 

 연뭇 앞에는 큰 부자집이 있었는데

 소문이 날 정도로 유명한 부자집이었고

 동네사람 대부분이 부자집 논밭을 경작하며 세경을 바치면서 살아가는데

 해마다 부자집의 곡간은 쌀 가마가 그득히 쌓여 재산은 날이 갈수록 불어 났다

 

그런데 부자집 인심은 고약하여 소문이 날 정도였지만

 부자집 식구 모두가 욕심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주인 대감만이 유독 욕심이 많았다

 

 부엌에서 하인들이 밥을 지을 때 먹나, 안먹나를 감시하고

 심지어는 소작농의 논과 밭에 가서 농작물의 수확상태를 점검하여

 가을겆이 후 세경이 적으면 호통을 치면서 더 내놓도록 하는 소문난 구두쇠였다

그런
구두쇠 부자집에 경사가 났다

이웃마을에서 새색시가 들어온 것

 며느리는 소문난 효녀 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어렵게 살아가는 소작 농가였지만 천성이 착하여

 다들 며느리감으로 탐을 내던 터에 부모가 병에 걸려 치료를 받아야하나

 약을 구할 돈이 없어 중매장이의 소개로 부자집에 딸을 시집 보내고

양식과 돈을 얻어 아버님 병도 고치고 생활도 조금은 풍족하게 할 수 있었다

착한 며느리는 시댁에 들어와 아랫사람들을 위해 베풀었다

시아버지 몰래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어려운 일에 부딪치면 슬기롭게 해결해 주는 고마운 상전이었다

 

 어느날 이곳에 스님 한분이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 하기를 권했다

 낮잠을 자던 주인대감은 목탁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하인이 두엄을 치다가 말고 왠 스님이 시주 하기를 권한다고 아뢰자

주인 대감은 두엄을 치는 하인의 쇠스랑을 뺏더니 두엄을 한삽 떠서 스님의 바지가랭이에 넣어주었다

이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던 며느리는 기겁을 하며 숨었다가

스님이 마을을 벗어나려 할 때 쌀 한되박을 들고 쫓아가서 시아버지의 행동에 사과를 하였다

스님은 며느리의 기특한 행동에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내일 모래 뒷산 전월산에 올라가 정상까지 가 보시오. 가는 도중 절대로 뒤 돌아봐서는 아니됩니다

어떠한 소리가 나더라도 앞만 보며 산 정상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스님은 어데론가 사라졌다

 

 며느리는 기이한 일이라면서 스님이 가르쳐 준 날에 전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은 높고 가파랐다

며느리가 조심스럽게 산을 오르려는데 갑자기 하늘이 검게 변하더니 천둥번개가 치는 것이었다

며느리가 오르는 산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지만

소리로 보아 산아래 마을에는 많은 비가 내리는 듯 했다

 

며느리는 불안하였다

산 아래 마을에 얼마나 많은 비가 내리고 있으며 집은 무사한가 당장 뒤돌아 확인하고 싶었지만

스님이 한 말이 생각나서 한발한발 산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며느리가 산 중턱에 올랐을 때 이번에는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며느리는 이 비명소리가 분명 마을 시댁쪽에서 났기 때문에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마을이 온통 물속에 잠기어 마치 넓은 바다의 작은 섬에 와 있는 것처럼

 많은 비가 내려서 마을과 시댁은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뒤돌아 본 며느리의 모습이 바위로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스님의 말을 거역하여 바위로 변해 그 자리에 우뚝 솟아 있게 되었던 것이다.

훗날 사람들은 이 바위를 며느리 바위라고 부르면서

이루지 못한 일이 있으면 며느리 바위 밑에 와서 촛불을 켜놓고 정성을 다하여 치성을 드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용천(龍泉)의 전설

 

옛날 금강 맑은 물에서 자란 이무기가

승천(昇天)을 하기 위하여 이곳 전월산 정상 용천까지 굴을 파고 올라와

백년을 기도하면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고 승천하게 된다는 고려 초엽 얘기가 전해온다

 

   용천에 올라온 이무기는 승천하기 전까지는 몸가짐을 깨씃이 하여 티끌이 하나없는 맑음이 있어야 하고

용천 물 밖으로 나와서는 안되며

승천할 때 아이를 밴 여자가 보면 안된다는 옥황상제의 주문이 있었다 

 

  승천날에 임박한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피고 전월산이 온통 어둠에 휩싸였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이무기는 승천하라!"는 옥황상제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하늘에서 물줄기가 내려와 그 물줄기를 타고 한참 승천하는데

갑자기 물줄기가 엄추고 다시 땅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이무기는 이상해서 하늘을 쳐다보니 하늘에서 노한 소리가 들려왔다

 

 "천하의 바보 같은 녀석아!! 임산부를 주의 하랬잖아 건너마을 반곡의 임신부가 너를 쳐다보고 있지 않느냐!"

이무기는 소리를 듣는 순간 충격을 받고 

이 곳 용천으로 떨어져 버드나무가 되어 버렸다 

 

  버드나무가 되어버린 이무기는 반곡을 바라보며 원망이라도 하듯이

무럭무럭 자라고

무성하게 자란 나무가 반곡을 쳐다보면 반곡 여인네들이 바람이 나고 

양화리(陽化里)를 쳐다보면 양화리가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었다

 

  그래서 반곡 청년들은 밤이되면 전월산에 올라와서

몰래 버드나무를 베어 버리고

또한 양화리 사람들은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감시를 하여왔다
 
  또한 이 용샘은

고려충신 임난수 장군이 은둔하면서  

상여암(想麗岩)을 오르내릴 때마다 이 샘물을 마셨다고 하며

지금도 명주실에 돌을 달아 용샘에 넣으면 금강으로 나욘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고 한다 

 

 

 

 

 

 

 

 

 

 

 

 

전월산은

산의 동쪽이 금강과 미호천의 합류부여서

강물이 삼태극의 형상으로 돌므로 달밤에 이 산에서 동쪽의 강을 내려다보면

 강에 비친 달이 돈다는 데서 지명이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함

 

 

 

 

 

 

 

 

 

 

 

올해 5월 불이 나 나무들이 이렇게...안타깝다

 

 

 

 

 

 

 

 

 

 

 

 

 

 

 

아직 완공되지 않은 세종시의 명소가 될 중앙호수 공원

 

 

 

 

 

 

 

 

 

 

 

 

 

 

 

 

 

 

 

 

 

 

 

 

 

 

 

 

 

 

 

 

 

 

 

 

 

 

 

 

 

 

 

 

 

 

 

 

 

 

 

 

 

 

 

 

 

 

 

 

 

 

 

 

 

 

 

 

 

원수산은

차령산맥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며

 일명 부모산 또는 형제봉 그리고 문필봉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원수산의 남쪽에는

성재산의 토성과 금강물이 맑게 흐르고

동쪽으로는 전월산과 서쪽으로는 국사봉이 우뚝 솟아 있다

 

고려 충렬왕때 한희유 장군이 몽고군을 무찌를 때 이곳에 서서 지휘를 했다고 한다

 

향토지리지에 의하면

 이전에는 원수산 아랫 마을 사람들이 원수산이란 이름을 잘 쓰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전설 때문이다

 

 "아주 먼 옛날에 두 형제가 근동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살면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주인이 사이가 좋지 않으니 하인들까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작은 집 하인과 큰 집 하인이 길거리에서 싸움이 붙었는데

 하인들까지 참여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곡괭이, 몽둥이 등이 등장하더니 마을이 마치 전쟁터처럼 치열한 전투장으로 변하였다

 

 두 형제의 싸움에서 아우집이 이겼고

형은 아우와 매일 이렇게 살아갈 수 없음을 느끼고 이곳을 떠났다

그때 형과 아우는 마을 뒷산의 산봉우리가 되었는데

 둘 사이가 좋지 않아 이 산을 원수봉(왼수봉)이라 불렀다

 

이러한 내용이 입에서 입을 통하여 오래도록 전해 내려오니

이곳 마을 사람들은 원수산 아래 살고 있는 자신들이 부끄러워

누가 어디에서 사냐고 묻거나 마을 뒷산을 무엇이라 부르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고려사절요』에 수록된 연기대첩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제2의 전투지로 원수산이 확인됨에 따라 이 지명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원수산은

원래 산의 모습이 뾰족한 붓끝같이 생겼다 하여 문필봉이라 불렀는데

 연기대첩 이후 이곳을 원수산(元帥山)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표지석은 없고 시그널로 오산임을 표시한것 같다...??

 

 

 

 

 

 

 

 

 

 

 

 

 

 

 

 

 

 

 

 

 

 

 

 

 

 

 

 

 

 

 

언제 스님이 떠나셨는지 알 수 없는 빈 덕암사

 

 

 

 

 

 

 

 

 

 

 

세종더샵레이크파크 아파트(2013년 12월 완공예정)

 

 

 

한창 공사중인 도로를 따라서

 

 

 

 

 

 

 

 

 

 

 

양화마을 초입 차 세워 둔 곳으로...

 

**

 

 

울 신랑이 세종시에 조망이 좋은 산이 있다고 해서

검색을 하여 찾아간

 

오늘따라

뿌연까스로 조망은 시원치 않았지만

조망이 끝내주는

그렇게 힘들지도 않는

세개의 산을 탈 수 있는

 

주위의

공사가 완전히 끝나고 나면

풍광이 좋은 산이라

많은 사람들이 찾을 것 같은 곳이었다

 

맑은날에 또 다시 찾으리라

 

 

2012.   12.   20(목)

 

 

 

 

 

 

피아노 시인 Phil Coulter 연주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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